[김진영 목사님 설교문] 화목 하라
by 김진영목사님 | 17.04.15 05:49 | 8,260 hit




마태 5;21-26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에게 주신 모든 말씀이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죄의 원인을 찾아보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생기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첫 번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였습니다. 성경내용으로 볼 때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가족 간에 화목하지 못한 가정 인것 같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고 물어 보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한 가정이었다면 이러한 변명 보다는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라는 대답이 더 솔직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형제간의 살인이었으며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가정의 화목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온전하게 이루어 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을 때에 비로소 참된 화목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화목한 삶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화목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밑뿌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희생과 보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서는 가정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온전한 화목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화목 하라’ 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며 함께 은혜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불의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인은 불의한 자에게 희생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았지만 불의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한 가인을 죽이지 않으시고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창4;13)


불의의 희생물이 된 아벨을 대신해서 아담에게 셋째아들인 셋을 주셨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계속해서 불의의 후손이 되었고 셋의 후손은 의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까지 몰아넣은 마귀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세상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잠시 세상을 바라보며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마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을 삼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믿음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갈등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평생을 두고 말씀을 순종하며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믿음을 쌓았다고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로 빠지는 것은 순간적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다가 불의의 희생물이 된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셋의 후손마저도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열락을 즐기며 죄 속에 빠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심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당대의 완전한 자며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인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화목의 회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변하게 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의 신뢰관계가 이루어지면 화목한 인간관계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인간관계는 살인을 유발하게 됩니다. 날이 갈수록 살인과 폭행 등 강력범이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강력한 법이 만들어지며 경찰력을 증강하여 단속을 강화 시킵니다. 법으로 모든 범죄 행위를 다스리며 명랑한 사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법은 공정성을 가지고 엄격하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법으로 지배 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는 아닙니다. 솔선수범과 정직한 삶이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하며 서로가 신뢰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지 못하면 미움과 분노가 일어나게 되며 살인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21절과 22절에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나 형제를 어리석은 놈, 미련한 놈이라고 경멸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짓밟는 분노의 행위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 한마디 까지도 살인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살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지 못한 언어를 계속 사용하면 자신의 심령이 황폐하게 되며 인격이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로인해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과 자존심이 무시당하면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성을 잃게 되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자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사건의 원인을 분석 해 보면 제일 많은 것이 원한입니다. 원한을 품게 된 원인은 인격과 자존심이 무시당했기 때문이란 것이 첫 번째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을 한 사람은 별 생각 없이 했다고 해도 듣는 사람은 많은 상처를 받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를 소개합니다. 시편141;3절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라고 했습니다. 나의 입술에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세워 두셨다고 생각 한다면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 신중을 기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수준이 낮았을 때는 일상 언어에 쌍스러운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언어도 정화되어 욕설이 많이 사라진듯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대중화 되어 편리한 점도 많지만 인터넷의 가상공간에는 욕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욕설을 마음껏 올려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 교회의 성도님들은 장난으로라도 인터넷에 아름답지 못한 언어를 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 뿐만 아니라 행위로써도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도 화목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엡4;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 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 뿐만 아니라 행위로서도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도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23절과 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웃에 상처를 줌으로 원망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이웃과 화해를 하여 화목한 관계를 이룬 다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원망을 받는 자의 예배는 그 문제가 해결 될때 까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참여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심령을 감찰 하시고 남에게 원망을 받지 않는 자의 예배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화목에 대표적인 사람은 창26장의 이삭입니다. 이삭은 이방인의 땅인 그랄 지역에 살면서 우물을 일곱 개나 팠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을 판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전입니다. 첫 번째 우물을 팠을 때 그랄 주민들이 이삭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니 이 우물도 우리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힘들게 판 우물이지만 그들에게 주고 말없이 떠나 다른 곳에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 우물도 역시 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여섯 번이나 우물을 팠지만 모두 빼앗기고 일곱 번째 우물을 팠을 때 그랄 족들이 화해를 청해 옴으로 비로소 그들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삭이 그랄 족과 화목을 이루게 된 것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우물 여섯 개를 그들에게 주는 희생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적인 이치로 생각한다면 이삭은 어리석고 연약한 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묵묵히 희생을 감당함으로 이방인의 눈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수있게 된 것입니다. 창26;28절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음으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이삭은 여섯 개의 우물은 잃었지만 그 우물로 인하여 이웃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리인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그들에게 알려 주게 된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 우리들은 교회에서 형제자매들과 화목해야 하며 교회 밖에서도 인간관계를 화목하게 이루어 가야 합니다. 화목은 자기희생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 중심, 말씀중심으로 매사를 올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원망을 해소하며 서로의 잘못을 용서함으로 화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할 뿐만 아니라 이삭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가정에서나, 삶의 현장 속에서 화목한 인간관계를 이루어나가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갈릴리한인교회를 올바른 믿음으로 바로 세워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실천하는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아멘 --


로토루아 갈릴리교회 초대목사 김진영